"... 아, 정말이지 그날 나왔던 모든 이야기들을 한 마디도 빼두지 않고 되도록 전달하고 싶습니다. 마음만은 그렇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인지! 하지만 기억에는 몇 마디 정도가 남은 게 전부였지요. 그러니 친절하시고 현명한 여러분, 제가 전해드리는 말들은 그저 훌륭한 애독자들의 수다에 대한 기억의 파편이요, 오독이요, 흔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제부터 드릴 말씀은 올초에 출간된 러시아 고딕 소설집과 그 책을 읽고 서점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싸움에 관해서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책 제목은 『난 지금 잠에서 깼다』입니다. 발레리 브류소프의 단편 제목이기도 하지요. 러시아 고딕을 주제로 열한 작가들의 열세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앞으로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가 제각각이거나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때는 3월, 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기묘한 밤이었죠. 유난히 쌀쌀해서 저녁이 되자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마다 몸을 떨었습니다. 강원도 폭설주의! 안전문자가 날아왔습니다. 거리에서는 이른 저녁부터 이미 한 잔 하고 취기가 살짝 돈 술꾼들이 부르는 흥겨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모임의 진행자는 우리에게 끄바스와 러시아 홍차를 대접했고, 간식으로는 할바(halva)를 흉내낸 러시아 초콜릿이 나왔습니다ㅡ물론, 그건 진짜 '할바'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요. 모임에는 자신이 퀴니히스베르크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어느 독자와, 책을 읽지 않았지만 직관과 계시로 내용을 이미 독파했다고 말하는 신비주의자들, 옛 러시아의 향수를 간직한 망명 독자, 결투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문학도, 척척학사, 선량한 시민, 고딕소설에서 걸어나온 듯한 수수께끼의 인물 ... 등등이 있었습니다. 참가 인원은 소설에 실린 작가 수에 꼭 맞춘 열한 명이었습니다. 사튀로스 문학 수다회의 전통에 따라, 자기 소개 없이 돌아가며 가장 마음에 드는 단편의 제목을 하나씩 말하게 되었습니다.
'자, 돌아가며 한 작품씩 말씀해 주세요. 불가코프는 제외하고 얘기합시다.'
'왜 불가코프는 투표에서 배제하시지요?'
'두 작품이나 실려서 불공평한데다가 국내 초역작은 아니어서 이번 기회에 새로 소개된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면 어떨까 하구요.'
'그런 줄 모르고 불가코프 위주로 읽었는데! 불가코프가 좋았습니다, 저는. 저는 불가코프를 읽을 겁니다. 최애작 투표에도 〈미치광이 화가〉에 미리 표를 던집니다! 무서워요, 〈심령회〉도 아주 우스꽝스러웠고.'
'여러분, 양귀비씨앗빵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아시나요? 〈라페르토보의 양귀비씨앗빵 노파〉를 영업합니다. 여기엔 할머니와 고양이가 있습니다.'
'저는 표제작인 발레리 브류소프의 〈난 지금 잠에서 깼다 ㅡ 사이코패스의 수기〉가 가장 무섭고 기이했습니다.'
'의외였지요! 발레리 브류소프의 단편 소설. 서술과 문체가 아주 재밌었습니다.'
'저라면, 지나이다 기피우스의 「상상 ㅡ 한밤의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겠습니다. 그분의 시와 소설들을 앞으로 더 만나보고 보고 싶어졌습니다. 마치 오늘 우리의 모임 같기도 하고요.'
'〈입체경〉에 한 표!'
'저도 〈입체경〉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최애작으로 아우성칠 때, 한 사람이 손을 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최애작 배틀 수다회라니, 이건 ㅡ 처음부터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 얘길 먼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가별로 수록된 작품 편차가 큽니다. 고딕 소설을 중심으로 편집하는 바람에 어떤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평작이 선택된 반면, 다닐 하름스 같은 경우는 그야말로 최고 대표작이 실렸어요! 〈노파〉, 이건 러시아 문학사의 걸작 단편입니다. 다른 작가들에게 지나치게 불공평한 조건입니다. 그러니 유권자 여러분께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형평성을 발휘하시여 소중한 한 표 행사하시기 바랍니다.'
'맞소, 하름스의 〈노파〉는 최고 걸작이지.'
'최고작을 투표 대상으로 올린단 건, 그 작품을 모욕하는 거요.'
'그럼 불가코프처럼 논외입니까?'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습니다. 어떤 애독자는 자신의 다른 최애작이 충분히 논해지지 않는 상황에 분개한 나머지, 차마 문자로 옮기기 어려운 말들을 웅얼거리고는 박차고 일어나 자리를 떠났습니다. 옆자리에서 그 무서운 주문의 내용을 알아들은 참가자는 깜짝 놀라 성호를 긋기까지 했구요.
'이 작품이 번역된 건 분명히 감사한 일입니다. 최애작 투표라는, 우리 독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술수에 휘둘리지만 않는다면요. 취향 너머 걸작이라는 말이 있지요. 반대로 말하면 걸작을 취향이라고 말하긴 좀 부끄럽단 말입니다. 최애작이라고 하기에도 송구할 정도로, 하름스의 〈노파〉는 뿌슈낀에서부터 시작된 러시아 문학사의 정점에서 마침표를 찍는 최고 걸작 단편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글을 쓰다가 작자가 원고지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내용입니다. 작자와 작중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작자가 자신이 쓴 작품으로 들어가 작중인물의 운명에 처하지요. 그것도 내가 죽이지 않은 살인을 저지르면서요.'
'죽은 노파는 누굴까요, 눈치채신 분? 네! 그렇습니다. 바로 〈죄와 벌〉의 노파이지요. 3시 15분 전이 언제입니까? 네! 바로 뿌슈낀의 사망 시각이에요. 러시아 문학은 종말을 맞이한다는 은유이자 선고!'
사람들이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잠시, 여러분에게 한 가지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사실 이 수다회에서 벌어지는 얘기를 완전히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거든요. 러시아 문학이라고 해봐야 제가 읽은 건 어린이판으로 각색된 똘스또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전부였으니까요. 그저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라온 모집 광고가 재밌어 보여서, 순수한 동기로 참여한 게 다였습니다.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 없던 시절에 거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신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죠. 작품의 창작 시점이 스탈린 독재와 숙청이 자행되던 1930년대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어떻게 이런 작품을 당시에 썼나 싶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영원한 이름으로 아멘.'
'아아, 아멘!'
두세 사람이 숙연해진 얼굴로 아멘! 아멘! 을 외쳤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쳐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지요. 불가코프 소설에 나오는 심령회가 잠시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그 소설을 생각하느라 제가 도망갈 타이밍을 놓친 사이에도 이들의 수다는 계속되었습니다.
'노파라는 번역어에 관해서도 한 번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나이든 여성을 지칭하는 말을 한국어로 옮길 때, 멸칭이 섞인 표현이 아닌가 싶어요. 가령 노부인이나 할머니로 옮긴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번역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소설들에서 고민 없이, 특히 옛날 번역일수록 그런 것 같긴 한데요. 특히 고딕소설이나 괴기한 분위기의 단편에서 '노파'라고 번역하는 것이 최선일지 조금 고민됩니다.'
'맞습니다. 가령 ㅡ이것이 답이라는 건 절대 아니지만 ㅡ 〈죄와 벌〉의 전당포 노파가 할머니나 노인으로 번역되면, 라스꼴리니꼬프가 저지른 살인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듯 합니다.'
'그렇네요. 하지만 다닐 하름스에도 적용해 본다면, 하름스의 단편 〈할머니〉... ? 전혀 다른 작품일 것 같은데요!'
유쾌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갔습니다. 저는 점점 정신이 흐려졌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서점에 있던 커다란 괘종시계가 열한 번 종을 쳤습니다. 진행자가 자정이 되기 전에, 오늘의 최애작을 선정하는 투표가 시작된다고 알렸습니다. 모두들 한 표라도 더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최애작을 영업하는 최종발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로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었던 알렉산드르 그린이 수다의 도마 위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러나 그 재미있는 이야기는 제가 어설프게 얘기하는 것보다 아마도 다른 분으로부터 직접 전해 듣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 외에도 가지가지 들은 말들을 전해야겠는데 ... 참, 투표 결과가 어땠냐하면... "
첫 번째 사람은 한참 말하고도 시간이 부족하여 〈스틱스 강 다리〉에 관한 무서운 해석이니, 〈베네치아 인간〉에 대한 혹독한 평가니, 〈입체경〉에 관한 개인적 추억담 등 그 자리에서 오갔던 다른 대화들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지만 어찌되었거나 그가 말을 충분히 길게 해버리는 바람에, 다음 차례를 대기하던 이들이 모두 지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제 말이 충분히 길어진 것 같으니, 일단은 이쯤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쓰러진 자기 일행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말려 올라간 가운 밑으로 목이 잘린 러시아식 장화를 신은 앙상한 맨다리가 삐져나온 게 언뜻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도 다 끝난 마당에 우리가 굳이 이런 세세히 점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