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점 벽에 달린 귀다. 여러분은 평소에 내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바깥쪽 서가와 안쪽 서가 사이에 머문다. 서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나는 그곳에 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숨 죽인 채로, 거의 모든 소리를 듣고 기억한다. 그러니 지난번에 열세 번째 서점지기가 온갖 불평과 한숨을 늘어놓으며 다른 서점지기들 몰래 비망록 제 68장을 발송한 사고도 전부 알고 있었다. 귀의 본분은 듣는 것이지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 본분에 맞게 묵인했다. 비록 비망록의 편집진들이 발송본을 읽고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아 누웠더라도, 내가 보기에 그건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내가 침묵을 깨고 여러분 앞에 나서게 된 사연이 있다. 내가 들었던 소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나를 궁금하게 했던 소리에 대해서.
이 사연을 보다 자세히 전하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지난 유월부터 어떤 배우들이 주기적으로 서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서점지기들의 의뢰와 추천을 받아 여러 작품들을 검토하였다. 열띤 토론, 토론, 토론. 그리고 치열한 경선을 거쳐, 최종 투표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이 낭독극의 작품으로 확정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소설을 어떻게 낭독극으로?'
나는 의심했지만, 이들은 거침없었다. 공연을 하기 전까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명성만 들었을 뿐, 막상 읽기를 미뤄 두었던 예술가들은 이 마성의 작가에 급속도로 빠져들었고 한 줄 한 줄 심혈을 기울여 읽기 시작했다.
"(폭발)은 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다 다른 (폭발)이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연출하면 어때요? 관객들하고 사전에 사인을 정하면 어떨까요. 가령 '폭발'이라고 외치면 다 같이 눈을 감기로 약속한다든지."
"재밌는데요?"
"전 반대합니다. 제가 고루해서일지 모르겠지만, 이번 낭독극은 최대한 소설의 말맛을 살리는 방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제목은 왜 별의 시간일까요?"
"마카베아는 어떤 인물일까요? 어떻게 표현되어야 할까요?"
"그녀가 한 사람으로 육화-가시화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연민의 대상으로 쉽게 될 수 있으니까요."
"이 소설이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모든 대사에서 저는 힘을 뺐으면 좋겠어요. 젊은 시절에 쓰는 문장들과는 다른 에너지가 감지됩니다. 아주 노련한 작가,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소설가의 능수능란하지만 여유로운 문체라고 느꼈어요."
"마지막의 사고 이후에 서술에서 작자의 분노가 감지됩니다. 그래서 빠르기와 리듬을 조정하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분리되었던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통합되는 해방감 표현을 목표로 달려봅시다."
"여러분, 호흡과 톤을 서로 맞춰 주세요."
"흉성은 되도록 쓰지 말고, 서점 공간에 녹아들도록 호흡을 바꿔주세요."
"각자 다른 지향성으로 소리를 보내주세요."
여러 사람들이 시간을 겨우 쪼개어 모였고, 공연 전날 리허설은 자정이 되어 끝났다. 그들의 얼굴에서는 잠이 부족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희미하게 들뜬 낯빛이 아른거렸다. 일곱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별의 시간〉이 어디로 향할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첫 공연이 시작되었다. 나는 내 위치의 한계 때문에 안쪽 서가 간이 무대에서 펼쳐지는 공연은 볼 수 없었다. 오로지 귀의 본성과 본분대로,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만을 숨죽여 들었을 뿐이다.
80여분 남짓한 낭독이 이어지는 동안, 내게 감지되었던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폭발)이었다. 무수한 폭발들. 비로소 그때서야 몇 번째였던가, 연습에서 엿들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폭발)은 어쩌면 시간의 축이 이동하는 소리가 아닐까요. 〈별의 시간〉에는 여러 번 시간이 뒤틀리고 바뀌는 순간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소설에는 시간의 세 층위가 존재합니다. 작품 바깥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클라리시.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그리고 작품을 창작하는 서술자-작가 호드리구의 시간. 창작된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작중인물 마카베아의 시간. 외부의 작가-클라리시는 미래의 시간(죽음)을 앞당겨서 작품 안에서 씁니다. 죽음의 실현을. 이 소설의 가장 주요한 등장인물이 죽음이잖아요. 그리고 폭발이 일어날 때마다 장면과 분위기, 어조가 전환되는 걸 떠올립시다. 여러 번 운명이 바뀌어요. 마담 카를로타의 집에서도, 앞선 여자의 불길한 운명(말장난이지만)이 마카베아의 미래와 바뀝니다. 가장 눈부신 순간입니다. 그리고 뒤틀린 여러 시간들의 축을 형상화한 '천각형의 별'!"
무대에서 (폭발)이 여러 목소리로 여러 번 울렸다. 소설은 서술자 호드리구의 입을 빌려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 시계바늘을 되돌려 사고가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 정말 그럴까. 소설과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연극의 무대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작자, 클라리시가 움직이고 개입하는 손길을 느꼈다. 그녀의 사랑을. 자신의 작별할 수 없는 과거이자 역사를 아주 조용히 면밀하게 조율하며 하나의 별로 음악처럼 빚어내는 순간을. '신은 어째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가'에 대한 아주 오래된 답으로서 소설을.
몇 년 전 누군가 ‘다음에 무엇을 쓸 것이냐’고 물었을 때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바란다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의 내 마음도 같다.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작가의 말에서.